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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铒) 1세(世) 휘 중선(仲宣)

 

▲왼쪽부터 2世 휘 영, 시조 휘 중선, 3世 휘 원장

 

이중선의 이름은〈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이영(李永)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李永大年安城人父仲宣以本郡戶長選爲京軍

〈高麗史97卷-列傳〉

〈이영(李永 2세)의 자는 대년(大年)이니 안성군(安城郡) 사람이다. 그의 아 버지 이중선(李仲宣 1세)은 그 고을의 호장(戶長)으로 있다가 경군(京軍)으로 선발되었다〉

 

高麗朝公初爲京軍戶長有長民之功遷至門下侍中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 太師封白夏卽安城古號也子孫

因而爲籍貫焉宋慶暦間公與宋使安燾陳睦渡 麗卽高麗文宗朝也歷使四朝及獻宗以凉德所致遜位于鷄林

公之時國事日非 故遂乞骸帰食采於白城縣也載麗事

〈대동보 세보(大同譜 世譜) 기록〉

〈고려 때 공(公)은 경군 호장이 되어 장민의 공(長民의 功) 즉 백성의 우두 머리로 백성을 잘 다스려 관직이 문하시중 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에까지 이 르렀고,백하군(白夏君)으로 봉해졌다. 백하는 안성의 고호이다. 그래서 자손 들의 관적(貫籍)이 되었다. 송(宋)나라 경력간(慶曆間)에 공은 송나라 사신 안도(安燾) 진목(陳睦)과 함께 고려로 왔는데,그때가 고려 문종(文宗) 때이다. 대를 이어 네 임금을 모셨는데 헌종(獻宗)이 병약하여 계림공(鷄林公)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나라의 어려움을 당한 충격과 비통을 참기 어려워 백성현(白城縣)으로 귀향하여 채식하며 살았다고 고려사에 씌여 있다〉

 

〈시조(始袓) 휘 중선(仲宣)에 대한 사적(事蹟) 정리〉

 

위 두 기록들로 시조 휘 중선의 관직(官職)과 사적(事蹟)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시조 휘 중선(仲宣)은 고려 문종(文宗) 때 사람이다.

백성군(白城郡) 즉 안성(安城)의 호족(豪族)인 휘 중선(仲宣)은 안성이씨의 시조(始祖)이다. ‘이중선은 고려 시대 호장(戶長)’이라고 고려사(高麗史)에 명시되어 있다.

호장은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들이 수행하던 향토 실무행정을 총괄하였다. 신라 말 고려 초 지방의 성주나 호족(豪族)들에게 고려 태조가 호장,부호장의 향직 을 주면서 생긴 제도로 이들이 지방자치의 성과를 많이 거두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 호장(戶長)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수상까지 올라간 경우 가 무수히 기록된 것을 보면,고려시대의 호장은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시조 휘 중선(仲宣)은 이 호장으로 있다가 경군(京軍)으로 선발되었다. 경군(京軍)은 고려와 조선 시대, 수도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의 군사이다.

시조 휘 중선(仲宣)은 언제 기세(棄世)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기세(棄世)한 후 과거 공부하던 2세 아들 휘 영(永)이 영업전(永業田)을 물려 받으려 서류를 꾸민 내용이 고려사에 나온다.

 

안성이씨 세보(世譜)에나 일반 자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시조 이중선(李仲宣)은 장민(長民)의 공으로 문하시랑에까지 올랐다. 고려 헌 종조(獻宗朝)에 발생한 이자의(李資義)의 난 때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평정에 공 을 세워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올랐고,네 왕조에 걸쳐 벼슬을 지내다가 헌종(獻宗) 말에 이르러 치사(致仕)한 뒤 백하군(白夏君)에 봉해졌다. 백하(白夏)는 안성의 옛 이름이므로 후손들은 안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이들 내용을 정리하면,안성이씨 세보 대동보와 정사(正史)인〈고려사(高麗 史)〉의 두 기록 내용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숙종조(肅宗朝)에 생긴 이자의의 난 당시,상장군(上將軍)은 왕국모(王國髦)로 기록되었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은 고려 왕건 태조조 (王建 太祖朝)에 개국공신 30명과 명종조(明宗朝)에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이고 안성의 옛이름은 백성(白城)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중선의 본관인 안성의 고호가 백성(白城)이고 안성이씨 세보 대동보에 기록된 시조 중선 공의 벽상공신 칭호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안성(安城)은 고구려 땅이기도 했다가 신라 땅이기도 하는 접경지역이었다. 시조 휘 중선은 이곳에 살았던 토성(土姓)인 이(李)씨 성의 원주민 즉 안성 지역 호 족(豪族)의 장이었다.

 

마지막으로,안성이씨 시조(始袓) 휘 중선(仲宣)의 관직과 사적을 안성이씨 세보(世譜) 대동보(大同譜)의 기록과 그 세덕편(世德編) 등의 내용과 정사〈고려사(高麗史)〉기록 등을 다시 종합 요약해 본다.

 

즉 시조 휘 중선은 고려 문종조(文宗朝)의 안성 호족으로,당시 고려 정치사회 형편으로 지방 관리 호장(戶長)으로 지방 백성들을 다스리다가 정치적 변화가 있어,초관(初官)인 경군(京軍)으로 선발되었다. 안성이씨 세보와 그 세덕편 내용에 의하면 이때부터 충실히 근무하여 승진하다가 숙종조(肅宗朝) 당시 이자의(李資 義〉의 난(亂)이 발생하여 경군으로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를 도와서 난을 평정한 공적을 이루었다. 이후 1세 시조 휘 중선은 왕의 신임을 얻어 높은 관직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여 관향인 안성으로 귀향하여 여생을 지냈다 하는 내력이 추적된다.

 

〈이중선 시조와 관련 상식 자료〉

호장(戶長)과 성(姓)

향직(鄕職)은 고려 시대 지방의 토호(土豪)들에게 주던 벼슬이다. 그 유래는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 건국 시기에 지방의 토호들을 회유(懷柔) 수습하기 위해 적 당한 관직을 그들에게 내린 데서 시작되었다.

 

고려 시대엔 지방을 군현제도로 편성하여 중앙집권적 방식으로 통치했다. 전국을 5도와 양계로 구분하고,경(京) 도호부(都護府) 목(牧) 군(郡) 현(縣)과 특수 행정구역인 향(鄕) 소(所) 부곡(部曲) 등을 두었다. 또한 군사상의 요지에는 진 (鎮)을,교통상의 요지에는 진(津) 관(館) 역(驛) 등을 설치했다. 군현 이상에는 지방관을 파견했으나,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군현이 훨씬 많았다. 군현에는 호장 (戶長) 부호장(副戶長) 등의 향리가 지방관을 보좌해 실무를 보았다.

 

호장(戶長)이라는 관직은 주(州) 부(府) 군(郡) 현(縣) 등의 향임(鄕任)을 담당하던 관리로 섭호장(攝戶長) 정조호장(正朝戶長) 안일호장(安逸戶長) 등이 있었다. 호장(戶長)은 향직 중 가장 높은 것으로 고려 성종 2년(983년)에 향리의 직을 개 정할 때 신라 이래의 당대등(堂大等)을 호장(戶長)으로 개칭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방호족이 이에 임명되었으며,그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부에 들어가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명문거족의 시조 태반이 호장출신이었 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향리(鄕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수상까지 올라 간 경우가 무수히 많은 것을 보면 고려시대의 호장은 사회적 지위가 낮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 제75권 선거지에 보면 향직의 품계(品階)로는 정1품은 삼중대광 종2품은 중대광이라 하고,정2품은 대광 종2품은 정광이라 하며,정3품은 대승 좌승이라 하고,정4품은 대상 종4품은 원보라 하며,정5품은 정보라 하고,정6품은 원윤 종6품은 좌윤이라 하고,정7품은 정조 정위라하고 8품은 보윤이라 하 고, 9품은 군윤 중윤이라 하였다.

〈高麗史 선거지〉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기록되어 있는 각 성(姓〉의 시조를 보면 경주를 본으로한 박(朴) 석(昔) 김(金) 삼성과 이(李) 최(崔) 정(鄭) 손(孫) 설(薛) 배(褎) 등 6부의 성을 비롯하여 신라 이전의 사람을 시조로 한 성(姓)도 약간 있으나 대부분은 고려시대의 사람을 시조로 삼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고려시대 때부터 일반민 중들도 중국식 성을 썼기 때문이다.

성(姓〉은 본래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지 우리나라 고유문화가 아니다. 우리가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 문화를 수입한 이후의 일로 대략 4세기 내지 5세기무렵 삼국시대부터이나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으로 중국에 내왕한 일부 귀족과 유학생 등이 사용하였을 뿐이다. 기타 귀족과 일반 민중은 거칠부,이사부,사다함 등과 같이 우리말로 된 이름만 사용하고 성은 쓰지 아니하였다.

 

고려 초기부터 중앙정부의 관리는 대개 성을 사용하였으나 호장,부호장 등 지방의 호족과 일반 국민은 여전히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고려 중기 문종 9년(1055년)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한다는 법령을 정한 후부터 호장,부호장 등 지방의 호족도 차츰 성을 쓰기 시작하여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거 의 다 성을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신라 이래의 고성(古姓)은 10여 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시대에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안성이씨(安城李氏) 시조 이중선(李仲 宣)과 마찬가지로 한산이씨(韓山李氏) 시조 이윤경,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 이석,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 박응주,동래정씨(東來鄭氏) 시조 정지원,풍산유씨(豊山柳氏) 시조 유절,고령신씨(高靈申氏) 시조 신자성 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시조 중 고려 말기의 호장이 많은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일반 참고 자료〉

 

경군(京軍)

경군(京軍)은 고려시대 중앙군이었다. 경군(京軍)은 고려와 조선 시대,수도 지역에 주둔하던 군대의 군사이다. 고려시대의 중앙군 사조직을 ‘2군 6위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기원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정부가 지방의 호족들이 사병으 로 유지하던 군사력을 일원적인 중앙군 조직으로 재편성하려고 노력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중앙군 조직의 재편성은 태조 때부터 시도되었는데,성종때를 전 후하여 지방의 군사력이 해체되고,2군과 6위의 새로운 군사조직이 마련되었다.

 

이군(二軍)은 경군(京軍)의 핵심부대인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의 통칭이다. 6위(六衛)는 고려시대 중앙군 조직인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홍위위(興 威衛)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2군 6위의 각 군과 각 위의 최고 지휘관은 상장군이다.

6위 체제는 995년(성종 14년)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2군은 1017년(현종 8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 개국 이후 고려의 2군 6위에 태조 의 친위병인 의홍친군(義興親軍)의 좌우위를 합쳐 10위 군으로 경군을 이루었다.

〈일반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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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의(李資義)의 난(亂)

고려 제14대 헌종(獻宗) 때이다.

중추원사 이자의(李資義)는 원신궁주의 오빠다. 그는 재물을 좋아하며,건달들 중에 날째고 용맹한 사람들과 함께 승마,궁술 연마를 자주했다.

이자의가 늘 이들에게 말했다.

“지금 임금은 병이 들어서 오늘 내일 어떨지 모르고,왕자의 서자들 중에서 왕위를 탐내는 자 있으니,그대들은 한산후(漢山侯)를 잘 모시고 왕위를 다른 사람 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이때에 그는 군사를 모으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계림공(鷄林公) 희(熙)가 명복궁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소태보(邵台輔)에게 비밀히 말했다.

“국가의 안위(安危)가 이제 재상(宰相)에게 달렸으니, 일이 급하게 되었다. 이를 물리치고 공(公)을 세워라”

태보는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호위(護 衛)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즉시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를 시켜 자의(資義)와 그 당파인 합문지후(閤門衹侯) 장중(張仲) 중추원 당후관(中樞院堂後官) 최충백 (崔忠伯)을 죽이고,군사를 나누어서 이자의의 아들 작(綽)과 장군 승렬(崇烈) 택 춘(澤春) 등 17명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이외 문하시랑 평장사 이자위(李子威)와 소경(少卿) 김의영(金義英) 사천소감(司天少監) 황충현(黃忠現) 등 50여 명을 잡 아서 남쪽 변방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이 적들의 처자(妻子)를 적몰(籍沒)하여 노 비(奴婢)로 만들었다.

 

헌종은 계 림공(鷄林公)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계 림공 희가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제 15대 임금 숙종(肅宗)이다.

〈高麗史,일반 자료 참고〉

 

벽상공신 (壁上功臣)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에 처음 벽상공신이란 말이 나타난다. 936년(태조 19년)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동서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는데,벽상공신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신홍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 공신당(功臣堂)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 다음과 같다.

 

홍유(洪儒 :殷悅) 배현경(褎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 겸( 卜智謙) 유금필(庾黔 弼) 김 선궁(金宣弓) 이총언(李忿言) 김선평 (金宣平) 권행(權幸) 장정 필(張貞 弼) 윤 신달(尹莘達)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이능희(李能希) 이도(李棹) 허선문 (許宣文) 구존유(具存裕) 원극유(元克猷) 금용식(琴容式) 김원술(金萱術) 한란(韓蘭) 강여청(姜餘清)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나총례(羅聰禮) 이희목(李希 穆) 염형명(廉邢明) 최필달(崔必達) 김흥술(金弘述) 김락(金樂) 등이다.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명종이 무신난의 주동자들에게 내린 예 외에는 없다. 그 무신 집권 때 벽상공신 칭호를 받은 인물은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 3인이다. 1170년(의종 24년)에 정중부가 난을 일으킨 뒤, 사흘 만에 의종을 거제도로 내쫓고 의종의 동생 호(皓)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이가 바로 명종이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이들 3인의 초상을 그려 조정의 벽에 붙인데서 이들 3인이 벽상공신이라 칭해졌다.

〈高麗史,일반 참고 자료〉